취미생활/한시감상

[스크랩] 난고평생시 < 蘭皐平生詩 >

德川 2013. 10. 27. 20:37

//

 

 

 

난고평생시 < 蘭皐平生詩 >

 

 

조소수혈개유거   鳥巢獸穴皆有居  새도 둥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고아평생독자상   顧我平生獨自傷  내 평생을 돌아보니 저절로 가슴 아파

망혜죽장로천리   芒鞋竹杖路千里  짚신에 대지팡이 천 리 길을 떠돌며

수성운심가사방   水性雲心家四方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 천지 집 삼았네

우인불가원천난   尤人不可怨天難  남의 탓도 못하고 하늘 원망도 못하니

세모비회여촌장   歲暮悲懷餘寸腸  세모에 서글픔이 가슴에 가득하네

초년자위득락지   初年自謂得樂地  어려서는 즐거운 세상이라 생각하며

한북지오 생장향  漢北知吾生長鄕  한양이 나고 자란 고향인 줄 알았지

잠영선세부귀인    簪纓先世富貴人 집안 은 대대로 부귀 영화 누렸고

화류장안명승장   花柳長安名勝庄  꽃 피는 장안의 명승지 에 집 있었네

인인야하롱장경    隣人也賀弄璋慶 이웃들은 아들을 낳았다 축하 하고

조만전기관개장    早晩前期冠蓋場  조만 간에 출세 하기 기대들 했는데

발모초장명잠기    髮毛稍長命漸奇  머리칼 겨우 자라 팔자 가 기박 해져

회겁잔문번해상    灰劫殘門飜海桑  뽕나무 밭 바다 되듯 집안이 망 하였네

의무친척세정박    依無親戚世情薄  의지 할 친척 없고 세상 인심 박해지고

곡진야양가사황   哭盡爺孃家事荒   무모상 을 마치자 집안 황폐 하였네

종남효종일납이   終南曉鍾一納履   남산 새벽 종소리에 짚신 끈을 매고

풍토동방심세량   風土東邦心細量  동방 풍토를 돌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심유이역수구호   心猶異域首丘狐   마음은 타향 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요

세역궁도촉번양   勢亦窮途觸藩羊  형세는 울타리 에 뿔 박은 양 과 같네

남주종고과객다   南州從古過客多   남녁 지방 옛 부터 나그네 많다지만

전봉부평경기상   轉蓬浮萍經幾霜   부평초 내 신세 벌써 몇 년이 지났나

요두행세개본습   搖頭行勢豈本習   머리 굽실거리림이 어찌 본래 모습이리

결구도생유소장   潔口圖生惟所長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 만이 늘었네

광음점향차중실  光陰漸向此中失   이리 살며 세월을 차츰  잃어버려

삼각청산하묘망   三角靑山何渺茫   삼각산 푸른 모습 아득하기만 하네

강산걸호관천문   江山乞號慣千門   강산 떠돌며 구걸 한 집 수 없건만

풍월행장공일양   風月行裝空一襄   풍월 시인 행장 은 빈 자루 하나뿐

천금지자만석군   千金之子萬石君  천금의 부자와 만석군 부자 들의

후박가풍균시상   厚薄家風均試嘗  후하고 박한 가풍 고루 맛 보았네

신궁매우속안백   身窮每遇俗眼白   신세가 궁박한 멸시하는 눈총 받고

세거편상빈발창   歲去偏傷빈髮蒼  세월이 갈수록 느는 것은 흰 머리 뿐

귀혜역난저역난   歸兮亦難佇亦難  돌아가기 어렵고 머물기도 어려워

기일방황중로방   幾日彷徨中路傍  죽도록 길 위에 떠돌아야 하는 신세 였네.

                                    

                                           - < 나의 한 평생( 난고평생시) >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金笠)

 

출생 김병연(金炳淵)
1807년
경기도 양주 (추정)
사망 1863년 (57세)
전라남도 화순 동북
매장지 강원도 영월 와석리
별칭 김립, 방랑시인
직업 시인
배우자 장수 황씨
동거인 29세 때 기생 가련과 동거했던 것으로 추정
자녀 장남 학균, 차남 익균, 삼남 영규
부모 부친 김안근(金安根)
친척 조부 김익순(金益淳)

김삿갓(1807년 ~ 1863년)은 조선 후기의 풍자·방랑 시인이다. 본관은 안동 김씨로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한자로 표기할 때는 '삿갓 립'(笠)자를 써서 김립(金笠)이라고도 한다.

그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선천 부사로 있다가 항복한 것을 두고 비난하는 시로 장원 급제한 것을 수치로 여겨, 일생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단장을 벗을 삼아 각지로 방랑을 했다. 도처에서 독특한 풍자와 해학 등으로 퇴폐하여 가는 세상을 개탄했다. 그의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되고 있다.

[편집] 생애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양반가문인 김안근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5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의 조부(祖父)이자 선천부사(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반란군 수괴 홍경래에게 항복---원래 咸興 中軍(함흥군관)으로 전관되어 온지 불과 서너달 되었다. 신임지에 와서 몇 달 동안 어수선한 일을 대충 정돈하고 겨우 한가한 틈을 얻어 숨을 돌리고 그 시골의 저명한 선비들을 모아 글도 짓고 술도 마시며 수일 동안 즐겁게 지내고 있었는데 새벽에 돌연히 반란군이 쳐들어와서 술에 취해 있는 防禦使(방어사) 김익순을 결박해놓고 안비막개(眼鼻莫開)로 항복하라 다그치니 갑자기 이런 지경을 당해서 얼떨결에 항복을 했던 것이다.(참고문헌:안동김씨문헌록)---하는 바람에 가문이 몰락되었다. 김익순은 그로 인해 조정으로부터 참수를 당하였으나 그 가족은 살려주기로 함에 따라 목숨만은 건지게 되었다. 그 후 황해도 곡산에서 가문에서 종노릇을 하던 사람의 집으로 가족이 피신하였으나 아버지는 도중에 사망하였고 어머니만이 살아남아 3형제를 키워냈었다. 그 중 차남인 병연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 솜씨가 뛰어나다는 정평을 받아 신동(神童)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후 강원도 영월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급제를 받게 되었는데 과거에 응시했을 때 시제가 공교롭게도 자신의 조부인 김익순의 역적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을 쓰라는 시제가 나오자 그는 서슴지 않고 김익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답글형식의 내용을 쓴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이자 자신이 그 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아 삿갓을 쓰고 전국 유랑을 떠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이름도 '병연' 이라는 본명 대신 '삿갓' 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한때 유랑 도중 집 안에 잠시 들렀다가 그 후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일설이 있다.

[편집] 조부 김익순과의 관계

당시 20세가 되었을 때까지 병연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어머니가 그들의 할아버지가 적장 앞에 무릎끓은 대가로 역적으로 몰린 사실을 아들들이 알지 못하도록 숨겨왔던 것이었다. 또한 아들들마저 역적의 손자로 낙인되면 조정과 세상으로부터 불신과 비난 등은 물론 목숨도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고있기에 일부러 할아버지의 존재를 숨겨왔던 것이었다. 때문에 병연은 자신의 할아버지 익순이 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결국 영월 백일장 때 나온 시제에서 김익순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그가 자신의 가족과 아무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여 그를 싸잡아 비판하는 답글을 쓰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야 어머니의 해명으로 인해 그제서야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그를 방랑길로 가게하고 삿갓을 쓰게 한 시초가 되었다.

[편집] 방랑의 시작

그가 본격적으로 전국 방랑길을 떠난 것은 20세 때 어머니가 할아버지 김익순의 존재를 해명한 후부터였으며 그는 방랑길을 떠나기 전에 갓을 파는 집으로 가서 크기가 큼지막한 삿갓을 주문하고 집에서 긴 지팡이와 동국여지승람 등 지도책 등을 소지하고 떠났다는 일설이 있다. 그에게는 충청남도 홍성에 외가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는 어머니와 처(妻)에게는 홍성의 외가에 다녀오겠다고하면서 자신은 사실상 정반대 북쪽의 금강산으로 첫 방랑을 떠난 후 한때 잠시 집을 들렀던 것을 제외하곤 사실상 가족들과 일체 연락을 끊은채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었다.

           

 

 

 

 

 

출처 : 붓장난
글쓴이 : 덕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