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翃
韓翃(한굉)은 생. 몰 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자는 君平으로 ‘大曆十才子’(당나라 대종 대력연간(776~779)에 활동했던 대표적 시인 열 명)의 한 사람이다. 天寶 13년(762)에 進士가 되었고, 肅宗 寶應 원년(762)에 淄靑 節度使인 候希逸의 막료로 근무했다. 德宗 建中 초년(780)에 中書舍人이 되었다.
寒食
春城無處不飛花, 寒食東風御柳斜.
日暮漢宮傳蠟燭, 輕煙散入五侯家.
*蠟; 밀 랍. 밀랍으로 만든 초. *侯; 과녁 후. 제후 후.
봄이 되니 성 안에 꽃이 안 날리는 데 없고,
한식날 동풍에 버들가지도 기울었다.
날이 저물자 한궁에서 새 불을 피워 나누어 주니,
가벼운 연기가 다섯 제후의 집에 흩어진다.
冬至로부터 105일 淸明 前 2일이 寒食인데 이 날은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다. 한식의 유래는 春秋時代 충신 介子推가 음력 3월 5일 산중에서 불에 타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기고, 이 날을 기념하여 민가에서 불 피우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한식이 끝나면 궁중에서 느릅나무나 버드나무 가지에 새로 피운 불씨를 蠟燭(밀납으로 만든 초)에 옮겨서 왕족이나 고관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위 詩에 나오는 五侯家는 漢나라 成帝가 외숙 다섯 명을 동시에 제후로 책봉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桓帝가 한 날에 宦官 다섯 명을 侯로 책봉하기도 했다. 중국 왕조의 역사를 보면, 환관들이 황제를 죽이거나 황제를 옹립한 경우가 많다. 환관들은 그만큼 득세한 역사가 비일비재하다. 결구에서 五侯家는 황궁의 불을 촛불에 댕겨간다는 것은, 황실의 권세를 환관들에게 넘어간다는 암시를 한 것이란 해석이 있다.
韓翃은 젊은 날, 柳씨 성을 가진 歌妓를 사랑했다. 그러나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한굉은 절도사의 속관이 되어 전쟁터로 나갔다가 3년 뒤에 장안으로 돌아와서 柳씨를 찾아 나섰다. 柳씨는 안록산의 난 중에 전공을 세운 토번족 장수 沙吒利의 차지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韓翃은 柳씨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章臺柳 章臺柳! 昔日靑靑今在否.
縱使長條似舊垂, 亦應攀折他人手.
*縱; 늘어질 종. 용서하다. 쫓다. *攀; 더위잡을 반. 늘어질 반.
장대의 버들이여! 장대의 버들이여!
옛날의 그 푸른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가?
만약에 긴 가지 예전처럼 늘어졌다면,
혹시 다른 사람 손에 꺾이지는 않았을까?
柳씨 또한 남몰래 答詩를 써서 보냈다.
楊柳枝 芳菲節, 小恨年年贈離別.
一枝隨風忽報秋, 縱使君來豈堪折.
*菲; 엷을 비. 보잘 것 없는. *堪; 견딜 감.
버드나무 가지처럼 보잘 것 없는 절개,
해마다 헤어져 있던 일이 한스럽지만.
한 잎이 바람 따라 시들었다 해도,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어찌 꺾기리오.
淄靑節度使 侯希逸은 韓翃과 柳씨의 사연을 상세하게 肅宗에게 보고하면서 은총을 빌었다. 肅宗은 沙吒利를 불러서 비단 이천 필을 내주며 柳씨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柳씨는 韓翃에게 돌아갔다는 사랑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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