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명시감상

[스크랩] 안개 /기형도

德川 2017. 11. 12. 16:16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을 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시의 제목이자 주된 배경이기도 한 ‘안개’는 기형도의 시에서 자주 발견할 수있는 소재이다. 처음 등단을 한 것도 ‘안개’라는 시를 통해서라고 하니 이 시는 그의 문학인생의 시작점이라는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시집<입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의 유고시집이다. 한 극장에서 사망한 그의 가방에는 시집 출판준비과정의 원고가 들어있었다. 그의 지인들이 모여 ‘입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을 정하고 시집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시집 준비 중이었던 기형도가 첫 작품으로 ‘안개’를 골라내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후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안개’를 꼽아 낸것 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누가 시집의 첫 작품으로 '안개'를 싣게되었든 기형도 자신에게나, 기형도를 사랑하고 그리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형도는 안개속에서 지워지는 사람들을 보며 안개를 빈 구멍속에 갇혀지는 것처럼 느꼈나보다. 하지만 안개의 빈구멍에 갇혀 공포, 고립, 단절을 느끼지만 오히려 안개가 걷히면 낯섦을 느낀다. 여직공이 겁탈당하고 취객이 얼어죽는 일도 개인적 불행일뿐이라고 담담히 말하고 있다. 그 모든 불행들이 안개속에서 너무 익숙해져버려서 너무도 담담해져버린것이다. 공장으로 폐수의 도시가 된 읍에서 사람들 사이에는 몽롱하고 모호한, 갑갑하고 두려운 안개로 채워져버렸다는 사실을 젊은 시인 기형도는 담담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절절한 한마디의 말보다 더 깊게 와닿는 것은 그 담담한 말투와 안개가 자아내는 뿌연 가려진 이미지가 큰 몫을 했다고 느껴진다. 또 젊은 그가 세상에 어두운 부분을 몸으로 느끼고 표현해냈다는 점도 한몫한 것 같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85년, 그때의 20대 기형도가 담담하게 또 절절하게 써내려간 시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기형도 시에 대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음습하고 어둡고 쓸쓸하고 처량한 이미지다. 수많은 상징들이 사용되어 모호하고 아리송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를 읽고 그의 시들이 ‘안개’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뿌옇게 내린 안개속을 헤치고 걸어가다보면 그 작은 미세한 안개의 입자들이 피부에 닿는 특유의 느낌이 든다. 촉촉하다기엔 좀더 무겁고 유쾌하지않지만 그렇다고 축축하다기엔 불쾌하진 않은,, 특히 코끝으로 싸한 공기가 들어오는 숨이 막힐것 같기도 한 그 느낌. 그런 매력이 기형도의 시에는 있는것 같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시를 읽고 한없이 우울한 기분을 감출수 없게 만들지만 또 그 우울함이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은... 그런 점들 때문에 기형도신화라고 불리는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20년간 나타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80년대를 혹자는 황금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당시를 살았던 젊은 시인 기형도가 그려낸 시대는 '안개'라는 두 글자에 모두 담겨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 안개는 내가 생각하는 안개처럼 매력적이지는 않다. 타인 대한 무관심,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고립, 단절로 뿌연 안개속을 헤매는 듯한 막막함과 안개속에 잠겨버릴듯한 느낌을 20대의 기형도는  숨막히게 느꼈었을것이다.  

**             


시인 ‘기형도 문학관’ 광명서 개관

                

시인 ‘기형도 문학관’ 광명서 개관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문학관이 10일 경기 광명시에 문을 연다. 광명시는 기형도 시인(1960~1989·사진)의 문학적 업적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 시인이 살았던 소하동 기형도문화공원에 문학관을 건립해 개관한다고 8일 밝혔다. 문학관은 지상 3층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졌다. 1층 상설전시실에는 시인의 일기장, 육필 원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상패 등 유족이 기탁한 유품 100여점이 전시된다.

상설전시실은 시인의 생애, 문학 배경, 테마 공간 의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2층은 북카페와 도서 공간, 다목적실이, 3층에는 수장고와 강당·창작체험실이 갖춰졌다.

10일 오전 10시 열리는 개관식에는 소리꾼 장사익씨가 기 시인의 시 ‘엄마 걱정’을 노래하고, 오후 4시에는 극단 낭만씨어터가 기 시인의 ‘사랑을 읽고 나는 쓰네’를 음악낭독극으로 공연한다.


기 시인은 1960년 경기 옹진군 송림면 연평리에서 태어나 1967년 서면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 타계할 때까지 살았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 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졌다.


출처 : 레지오단원들의 쉼터
글쓴이 : 멋쟁이(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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