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우리 민족이 나라를 다시 찾는 희망을 잃지 않도록 투쟁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사상가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 주옥같은 명시들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시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과 광복에 대한 희망, 부처에 대한 사랑과 깨달음 등이 배경이 되는 시를 주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여인과 사랑에 대한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한용운의 시 중 연시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시를 감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행 복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만해 한용운
그녀를 사랑을 하게 되면 그녀는 나에게 절대자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녀의 표정하나에 웃고 울게 되지요. 그래서 그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불행하면 나도 불행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를 존귀하게 여기고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녀가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나처럼 사랑한다면 나는 그녀를 정말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내 사랑을 빼앗길 수 있다는 걱정과 함께 내 사랑을 그 누구와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사랑과 질투라는 감정을 유발하지요. 그래서 내 사랑을 사랑하는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고, 미워하는 그 고통마저도 나에게는 행복인 것입니다.
만약에 온 세상 사람이 그녀를 미워하고 손가락질을 한다면 나는 그 사람들을 정말 미워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나는 정말 절망할 것입니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사람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만일 내가 미움을 받아서 그녀가 사랑을 받게 된다면 미움을 받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정말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는 감정이 클수록 나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그것으로 그녀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여인이 정말 행복하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녀를 연인으로 사랑하는 것은 견딜 수 없습니다. 그냥 한 인간으로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조금 이상합니다. 왜 내가 사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왜 그녀를 사랑함으로써 나를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평범한 선남선녀간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서로 사랑하게 되면 눈총 받게 되는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조선여인상
여기서 문득 그는 선불교 스님이라는 신분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한 스님으로 한 여인을 사랑하고 그 여인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한용운에게 1925년은 불꽃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의 역작인 시집 ‘님의 침묵’과 선불교 조동중의 수행안내서인 ‘십현담주해’를 잇달아 탈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 그의 곁에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이 있었고, 외설악 신흥사에서 그 여인과 함께 기거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내설악 백담사로 옮겼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자신의 신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서여연화라는 여인과 하고 싶지 않은 이별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973년경 신흥사
그렇다면 이 시는 서여연화라는 여인과 사랑을 노래한 지극히 개인적인 연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나는 독신생활을 해야 하는 신부, 스님, 수녀들에게 사랑이 찾아올 때 그 안타까움에 대한 속내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짝이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같이 금지된 사랑 - 그것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불륜이라고 합니다 - 그 아이러니한 감정들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문제는 금지된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더 격정적으로 타오른다는데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장애가 생기면 활활 타오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데 저는 동의합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있나요?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있듯이 남녀 간의 사랑도 이처럼 아름다울 수도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윤리도덕이나 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 순수한 사랑에는 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들의 사랑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늘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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