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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로소이다 |
홍사용(1900~1947) |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뿐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습니다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는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버렸오이다.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열 한 살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山)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넌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이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 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하고 앉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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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 '백조'3호 (1922.9) 수록. 참을 수 없는 민족의 설움을 읊고 있다. 이 시 속의 "어머니"는 바로 시인의 조국이다. 일제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서러운 조국의 현실을 주관적인 감상주의로 노래하였다. 주제는 참을 수 없는 민족의 설움.
산문시 경향의 자유시로서, 근대시의 활달한 시형식의 한 기틀을 마련해 준 의의 있는 작품이다. 제1연: 나는 나면서 부터의 숙명적 비극의 왕이라는 것. 제2연: 어머니(조국)조차 축복보다는 비극의 존재로 어머니의 짐만 됨. 제3연: 어머니로 해서 내가 배운 것은 그저 눈물 뿐. 제4연: 내가 "모가지 없는 그림자"(식민지의 아들)라는 놀림을 받고 울었다는 것. 제5연: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인 파랑새까지 잃고 만 절망감. 제6연: 성년이 되고 난 뒤에는 마음대로 울 자유조차 빼앗겼다는 사실. 제7연: 산천 초목조차 무심했고, 허구한 세월의 뜬 구름만 나의 눈물을 싣고 갔다는 것. 제8연: 설움이 있는 곳은 모두가 눈물의 왕인 내 영토라는 것.
[시왕전]: 저승에 있다는, 십대왕의 궁전. [감중연(坎中連)]: 태연히 함. 팔괘중 감괘(坎卦)의 상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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