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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는 왕이로소이다_홍사용(1900~1947)

德川 2015. 7. 26. 14:53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홍사용(1900~1947)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뿐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 하는 그 소리였습니다마는,
   그것은 '으아---' 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님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님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말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갈 때에도

어머님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벌거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 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는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버렸오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으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 한 살 먹던 해 오월 열 나흗 날 밤 맨 잿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뭇군의 산(山)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넌 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둣군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이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좋아 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 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 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하고 앉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해설]

* '백조'3호 (1922.9) 수록. 참을 수 없는 민족의 설움을 읊고 있다. 이 시 속의 "어머니"는 바로 시인의 조국이다. 일제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서러운 조국의 현실을 주관적인 감상주의로 노래하였다.

주제는 참을 수 없는 민족의 설움.

 

산문시 경향의 자유시로서, 근대시의 활달한 시형식의 한 기틀을 마련해 준 의의 있는 작품이다.

제1연: 나는 나면서 부터의 숙명적 비극의 왕이라는 것.

제2연: 어머니(조국)조차 축복보다는 비극의 존재로 어머니의 짐만 됨.

제3연: 어머니로 해서 내가 배운 것은 그저 눈물 뿐.

제4연: 내가 "모가지 없는 그림자"(식민지의 아들)라는 놀림을 받고 울었다는 것.

제5연: 최후의 희망이요 이상인 파랑새까지 잃고 만 절망감.

제6연: 성년이 되고 난 뒤에는 마음대로 울 자유조차 빼앗겼다는 사실.

제7연: 산천 초목조차 무심했고, 허구한 세월의 뜬 구름만 나의 눈물을 싣고 갔다는 것.

제8연: 설움이 있는 곳은 모두가 눈물의 왕인 내 영토라는 것.

 

[시왕전]: 저승에 있다는, 십대왕의 궁전.

[감중연(坎中連)]: 태연히 함. 팔괘중 감괘(坎卦)의 상형

 

 

출처 : 제코 블로그
글쓴이 : 태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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