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겪고 인생의 화두가 바뀌기도 한다. 오원근 변호사도 그랬다. 지금 그는 완벽한 행복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에 한창이다. 억지를 부리지는 않을 참이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넉넉한 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며, 가을이면 풍성함을 나누는, 그의 자연스러운 삶의 여정을 함께 따라가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작지만 강했던 그날의 결단
지난 12월 필자가 몸담고 있는 법무법인의 산악회에서 경남 사천에 있는 와룡산(798m)에 다녀왔다. 와룡산은 바로 옆에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끼고 있어서 바다와 섬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는 산행의 맛이 그만이다. 북쪽으로도 끝없이 펼쳐진(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보인다) 산의 무리가 우리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렇게 바다와 산에 홀딱 빠져 능선을 걷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여직원 슬아씨가 보들보들한 흙길이 무척 좋다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룡산 등산로는 흙길이 많다.
그 위로 솔잎이 떨어져 부드러움을 더해주었다. 나도 그 느낌에 빠져 있었는데, 슬아씨의 감탄사를 들으니 그 부드러움이 더 절절하게 다가왔다.
난 그곳에서 도시의 콘크리트, 아스팔트 바닥을 걸을 때의 느낌을 연상했다. 우리 몸의 구조는 굉장히 예민해서 조금만 집중하면 바닥이 두꺼운 신발을 신었어도, 흙과 콘크리트를 밟았을 때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차이는 사람의 심성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흙길을 밟으며 감탄사를 토해낼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 심성도 부드럽다. 난 와룡산의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자연스럽다'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 '자연스러움'을 화두로 삼고 있다. 자연스러움은 억지스럽지 않음이다. 자연스러움은 보는 이를 편안하게 하지만 억지스러움은 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
대기와 땅속을 단절시키는 콘크리트바닥이 억지스러움이라면, 대기와 땅속이 서로 통하는 흙바닥은 자연스러움이다. 시민과 소통하지 않는 정권이 억지스러움(독재)이라면,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권은 자연스러움(민주주의)이다. 난 나름 자연스러운 삶의 소중함을 통절(痛切)하게 느끼며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신 다음 난 10년 넘게 해온 검사직을 그만두었다. 평소 흠모하던 분이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직에서 모욕적인 수사를 받다가 돌아가신 것을 더는 견뎌낼 수 없었다. 사표를 던질 때, 꼬이고 꼬인 억지스러움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아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작지만, 자연스러운 삶을 위한 내 나름의 결단이었다.
난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그만둔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전북 부안에 있는 변산공동체에서 3주간 농사를 짓고, 이어서 경북 문경에 있는 정토수련원으로 100일간 출가해 행자생활을 했다. 그동안의 부자연스러운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돌아보며 자연스러운 삶을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귀농 공부농사는 내 평생소원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성장기에 농사의 경험은 흙이 내가 디디고 살아가야 할 바탕임을 내 무의식에 심어주었다. 흙에는 진짜 생명이 있다. 그 속에서 식물은 싹을 틔우고, 지렁이를 비롯한 무수한 생물들이 터를 잡고 살아간다. 한마디로 흙은 살아 있다. 사람도 그 흙과 함께해야만 제대로 된 생명이다. 난 어려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우며 그 '살아 있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눈을 돌려 도시를 살펴보자. 주변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학교 운동장도 인조 잔디로 도배되어가고 있다. 사람은 생명이다. 마땅히 살아 있는 가운데 있어야만 온전한 생명이다. 그런데 도시의 주변 환경은 거의 다 죽어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병들어간다.
우리 가족은 산에 다니고 텃밭농사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고 있다. 검사로 일하던 2002년경부터 주말 농장을 해왔다. 그런데 주말 농장은 그저 상추, 고추 따위의 채소만 키우는 것일 뿐 생태농업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난 본격적으로 귀농 공부를 하고자 서울중앙지검에서 근무하던 2009년 봄 서울생태귀농학교에 입학했다. 2개월 과정이었는데, 주중에는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용산에 있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고 주말에는 실습을 갔다.
검사일과 병행하는 것이라 힘들었지만 처음으로 학교다운 학교를, 내가 원하는 학교를 다닌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다. 생태귀농학교에서는 농사의 기술보다는 왜 생태농업을 해야 하는지를 철학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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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직접 일군 텃밭과 그곳에서 자라난 힘찬 새 생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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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농업은 자급자족을 위해 작물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좀 더 근본적으로는 비닐을 사용하지 않고, 석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농기계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요구한다. 물론 생태귀농학교를 나온 분들도 실제 귀농을 해서는 현재의 관행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근본적인 생태농업은 어렵다. 그래도 이것을 철저하게, 또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 난, 아직 본격적으로 귀농을 한 처지는 아니지만 그런 분들에게서 용기를 얻고 있다.
내가 머문 변산공동체에서는 인분을 퇴비로 만들어 사용하는 등 생태 농업을 철저하게 실천한다. 그들은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급자족하고 남는 것으로 불우한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고 있다. 검사를 그만두고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변산공동체에 간 것은 내겐 커다란 결단이었다. 처자식을 둔 상황에서 생계활동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으니까.
그것은 내가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삶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전에는 그렇게 하면 내 삶에 엄청난 재앙이라도 닥쳐올 것이라고 느꼈다. 물론 불안함이 있기는 했지만 난 변산공동체에서 농사를 짓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자유를 느꼈다. 흙과 함께하는 육체노동만이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경험했다.
백일출가까지 마치고 난 후 청주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청주 변두리에 있는 장인어른의 땅 40여 평을 빌려 텃밭농사도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두 해가 지났다. 상추, 쑥갓, 시금치, 열무 같은 잎채소 외에 감자, 옥수수, 고추, 오이, 참외, 콩, 참깨, 들깨, 마늘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심으면서 농사를 배우고 있다. 지금은 꽁꽁 언 밭에 마늘이 싹을 틔울 봄날을 기다리며 겨울잠을 자고 있다.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이란
새로 시작한 변호사 일과 텃밭농사를 같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주말에 시간을 내지 못하면 새벽에 가 한 시간 정도 일을 하고 출근하기도 한다.
아직 바쁘고 틀이 잡히지 않아 파종 시기를 놓치거나 김을 제때에 매지 못하기도 하지만 텃밭농사는 내게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자연스러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호미질을 하면서 흙의 소리를 듣고, 흙의 냄새를 맡고, 다양한 생명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언젠가 할 완전한 귀농은 보다 '완벽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된 소재는 텃밭농사가 되겠지만 변호사로서 겪는 일,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 등도 이야깃거리로 삼을 생각이다. 독자들도 필자와 함께 한 해 농사를 지으면서 흙과 함께하는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을 경험해보셨으면 좋겠다.
<■글 & 사진 / 오원근(변호사·농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