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명시감상

오월 / 피천득

德川 2020. 5. 11. 22:03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비늘잎도 연한 살결 같이 보드랍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 같이 쓸쓸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득료애정통고 사랑을 얻음도 고통이요
실료애정통고 사랑을 잃음도 고통이다

젊어서 죽은 중국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 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 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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