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생활/좋은 글

고은(高銀)의 詩

德川 2011. 2. 7. 16:58

 

※ 책 소개 : 만인보 8 (저자 고은(高銀) / 출판 1989년, 창비)

   시인생활 30년 만에 터져나온 고은의 봇물 같은 이야기시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에 관한 노래라 할 이 시편들에서

   개인적 망각과 역사의 그늘 속에 닫혀 있던 이땅 이름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시인에 의해 세계 속에 스스로 현시된다.

   역사적 인물들도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육화되고, 그 언어와 생각들은 가을 폭포처럼 툭 트였다.

  *제3회 만해문학상,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장항 기생

 

장항 선창 일꾼들이

선창가 소문난 기생 춘향이더러

우리는 돈 없어

자네하고 하룻밤 풋사랑 나눌 수 없으니

그 대신으로

하루에 한 번

점심때 쉴 참에

선창가를 지나가게나

그렇게 천하절색 자네 구경하는 것으로

우리는 더도 덜도 바랄 것 없네

 

낮 12시 반이면

비 오는 날 아니거든

틀림없이 옥비녀 꽂고

동백기름 자르르 바른 검은 머리

긴 자주 고름에 옥색 치마

저것이 사람인가

저것이 귀신인가

 

그 춘향이 그 시절이 찬란하였지

병들어 떠난 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여름내내 억새 우거지는데

 

 

대천 박형사 마누라

 

일제 때 보조원에다가

해방직후 사찰계 형사로 시작하여

그 박형사가 잡아들인 사람만

3년 동안 아흔아홉 명이라 한다

 

그 박형사네 집 지붕 위에는

기러기도 제 울음소리 떨어뜨리지 않고

입 다물고 지나간다 한다

 

날고 뛰는 박형사

그 박형사가

인공 때 튀지 못하고

그만 잡히다니

그 날래고 날랜 박형사가 잡혀

대천역전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즉각 사형선고 받고

그 자리서

척진 사람 나서서

낫으로 등짝 찍어버리니

마구 달려들어

뱃구레 박고

염통 찔러버리니

피 뿜어대며 죽어버렸다

 

그 뒤 굿은비 올 때

전봇대 밑에서

눈 째려보며 박형사 서 있는 듯하였다

 

박형사 마누라 혼자 살아 남아

당장 거지 되어

어디메 멀리 떠나라 해도

내 서방 죽은 땅에서 살겠다고

거지 되어 살아갔다

 

억척거라 15년 뒤

그 마누라 집도 절도 생겨나고

곗돈 잘 주물러대더니

부녀회장까지 되어

금비녀 꽂고 아장걸음 잘도 걸어

하루는 온양 가고

하루는 천앙 삼거리 가고

 

 

 

복산이 아범

 

 

대천 복판에서야

타고난 사주 건달 복산이 아범 모르는 이 없다

하루도 술기운 아니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술 대신 술찌게미라고

한 투가리 얻어먹어야 산다

술 먹은 귀신이라니

제 큰아버지더러

아 자네는 누구네 머슴인가

하고 헛수작하는 사람이라

누가 이 사람하고 상종하겠는가

오로지 개 잡을 때

돼지 잡을 때

손님 와서 닭모가지 비틀 때

그런 굿은 일에나 불러다가

실컷 부려먹는다

돼지 오줌보하고 창자하고 얻어다가

어째 또 한잔 없을쏜가

외상 소주에 안주 삼는다

 

그 복산이 아범 눈총깨나 받아서인지

늘 훨칠한 키다리였는데

픽 쓰러지더니

그 길로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작것 !

 

그의 죽음에 제일 슬피 운 사람은

그러니저러니 해도 장모였다

아 쭈그러진 장모였다

이놈아 내 딸 달달 볶아쳐먹더니

너 잘 간다 너 잘 간다

하고 통곡하고 달려와서

상여 나가는 날에는

너 못 간다 너 못 간다

내 딸 망쳐놓고 너 혼자 못 간다

하고 사설 반 울음 반 통곡하며

실성실성 춤까지 추어댄다

허나 죽은 사람 어쩌겠는가

그 당나귀 귀도

죽어서 무슨 소리 듣겠는가

 

동네 아낙

복산이 아범 욕은 맡아놓고 하던 아낙

한 마디 인사

 

흥 복산이 아범 그 영감 떠나니

이제 누가 우리 동네 개 잡어 ?

돼지 잡어 ?

장닭 잡어 ? 씨암탉 잡어 ?

 

 

 

 윤서방

 

 

딱 한 해 동안 대천 문구네 집

시큰둥히 머슴 살다 간 사나이

남녘 사나이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 쓰기가 황소 항렬인데

온종일 일만 할 뿐

가타부타 입 여는 법 없는 사나이

사람하고 눈 마주치는 것 싫어하여

외양간 황소 앞에서

멀뚱멀뚱

황소 새김질하는 것하고

눈 마주치느 사나이

 

그 사나이

저녁 모깃불 풀 한 짐 지고

바깥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올 때

꼭 산 하나 출렁대며 들어오는 것 같아라

 

그 사나이

그런 산으로 들어갔는지

어느 날 아침

언제나 베고 눕던 목침 하나 남기고 갔다

 

그 낫 서너 자루 단번에 갈던 사나이

 

 

 신석공이

 

아무리 무지막지한 싸움일지라고

그 사람만 가면

그 싸움 어찌어찌 가라앉는다

지랄병 난 사람

다 나 몰라라 하는데

그 사람이 업어다 주어

퉤 퉤 침 뱉으며 돌아선 뒤

마을이 예대로 고즈넉하였다

평생 남의 일 해주고

남의 마음 달래 주고

제 그림자마저

남을 위해 있다가

이 세상 떠났다

대천 신석공이

 

인공때

그 인공에 가담했다

 

그것으로 5년 동안

대전형무소 조용조용 살고 나왔다

고향에 있다가

서울 가서 살다가 병 나

밤중 서울에서 대천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그만 홍성 못 미쳐 숨 넘어갔다

 

그 신석공이 시체 업어 내린 날

하루내내 동네사람들 일손 놓았다

그 신석공이 묻히는 날

동네사람들 다 와서 세 번씩 곡하였다

 

마침 추석 전날이 장례날인데

다음날 추석날도

누구 하나 즐겁지 않았다

마을에 한숨 찼다

 

이불 없는 눍은이한테

이불 주어버리고

겨우내 덜덜 떨던 사람

신석공이

 

 

신석공이 마누라

 

대천 앞바다 삽시도에서

물 건너

대천으로 시집온 사람

잘도 생긴 사람

신석공이 사람

신석공이 마누라

어둑어둑 저녁나절

환히 피어나는 부용꽃 같은 사람

마음 어느 구석 뒤져보아도

사람 따지는 양심 없는 사람

일 잘하고

음식에 손 가면

그 음식에 설설 녹고

육회 잘 무치고

바느질 솜씨 좋고

손 가는 데마다 향내 나고

꼬인 일 풀어지는 사람

 

신석공이 마누라

그러나 그 금실 머던한 내외

잘도 살아가다가

지아비 신석공이 죽자

10년 지나

딸 키워 시집보내고

그 딸 뒤따라

새 지아비 얻어 나갔다

그렇구나

그 좋은 솜씨 써먹어야지

그 좋은 얼굴에 부용꽃 피어나야지

새살림 차린 뒤

긴 겨울철 처마 고드름 떨어지는 줄 모르고

그 고드름 녹는 줄 모르다가

고무신 끌고 나서서

먼데 아지랑이 바라보고

아이고 벌써 봄이 왔네

신석공이 마누라 아니라 장태문이 마누라

 

☞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의 우리 이웃 이야기를 되돌아 보는 것 같아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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