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 만인보 8 (저자 고은(高銀) / 출판 1989년, 창비)
시인생활 30년 만에 터져나온 고은의 봇물 같은 이야기시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에 관한 노래라 할 이 시편들에서
개인적 망각과 역사의 그늘 속에 닫혀 있던 이땅 이름없는 사람들의 사연이 시인에 의해 세계 속에 스스로 현시된다.
역사적 인물들도 새로운 존재양식으로 육화되고, 그 언어와 생각들은 가을 폭포처럼 툭 트였다.
*제3회 만해문학상, 제12회 한국문학작가상,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장항 기생
장항 선창 일꾼들이
선창가 소문난 기생 춘향이더러
우리는 돈 없어
자네하고 하룻밤 풋사랑 나눌 수 없으니
그 대신으로
하루에 한 번
점심때 쉴 참에
선창가를 지나가게나
그렇게 천하절색 자네 구경하는 것으로
우리는 더도 덜도 바랄 것 없네
낮 12시 반이면
비 오는 날 아니거든
틀림없이 옥비녀 꽂고
동백기름 자르르 바른 검은 머리
긴 자주 고름에 옥색 치마
저것이 사람인가
저것이 귀신인가
그 춘향이 그 시절이 찬란하였지
병들어 떠난 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여름내내 억새 우거지는데
대천 박형사 마누라
일제 때 보조원에다가
해방직후 사찰계 형사로 시작하여
그 박형사가 잡아들인 사람만
3년 동안 아흔아홉 명이라 한다
그 박형사네 집 지붕 위에는
기러기도 제 울음소리 떨어뜨리지 않고
입 다물고 지나간다 한다
날고 뛰는 박형사
그 박형사가
인공 때 튀지 못하고
그만 잡히다니
그 날래고 날랜 박형사가 잡혀
대천역전 인민재판에 끌려나와
즉각 사형선고 받고
그 자리서
척진 사람 나서서
낫으로 등짝 찍어버리니
마구 달려들어
뱃구레 박고
염통 찔러버리니
피 뿜어대며 죽어버렸다
그 뒤 굿은비 올 때
전봇대 밑에서
눈 째려보며 박형사 서 있는 듯하였다
박형사 마누라 혼자 살아 남아
당장 거지 되어
어디메 멀리 떠나라 해도
내 서방 죽은 땅에서 살겠다고
거지 되어 살아갔다
억척거라 15년 뒤
그 마누라 집도 절도 생겨나고
곗돈 잘 주물러대더니
부녀회장까지 되어
금비녀 꽂고 아장걸음 잘도 걸어
하루는 온양 가고
하루는 천앙 삼거리 가고
복산이 아범
대천 복판에서야
타고난 사주 건달 복산이 아범 모르는 이 없다
하루도 술기운 아니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술 대신 술찌게미라고
한 투가리 얻어먹어야 산다
술 먹은 귀신이라니
제 큰아버지더러
아 자네는 누구네 머슴인가
하고 헛수작하는 사람이라
누가 이 사람하고 상종하겠는가
오로지 개 잡을 때
돼지 잡을 때
손님 와서 닭모가지 비틀 때
그런 굿은 일에나 불러다가
실컷 부려먹는다
돼지 오줌보하고 창자하고 얻어다가
어째 또 한잔 없을쏜가
외상 소주에 안주 삼는다
그 복산이 아범 눈총깨나 받아서인지
늘 훨칠한 키다리였는데
픽 쓰러지더니
그 길로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작것 !
그의 죽음에 제일 슬피 운 사람은
그러니저러니 해도 장모였다
아 쭈그러진 장모였다
이놈아 내 딸 달달 볶아쳐먹더니
너 잘 간다 너 잘 간다
하고 통곡하고 달려와서
상여 나가는 날에는
너 못 간다 너 못 간다
내 딸 망쳐놓고 너 혼자 못 간다
하고 사설 반 울음 반 통곡하며
실성실성 춤까지 추어댄다
허나 죽은 사람 어쩌겠는가
그 당나귀 귀도
죽어서 무슨 소리 듣겠는가
동네 아낙
복산이 아범 욕은 맡아놓고 하던 아낙
한 마디 인사
흥 복산이 아범 그 영감 떠나니
이제 누가 우리 동네 개 잡어 ?
돼지 잡어 ?
장닭 잡어 ? 씨암탉 잡어 ?
윤서방
딱 한 해 동안 대천 문구네 집
시큰둥히 머슴 살다 간 사나이
남녘 사나이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 쓰기가 황소 항렬인데
온종일 일만 할 뿐
가타부타 입 여는 법 없는 사나이
사람하고 눈 마주치는 것 싫어하여
외양간 황소 앞에서
멀뚱멀뚱
황소 새김질하는 것하고
눈 마주치느 사나이
그 사나이
저녁 모깃불 풀 한 짐 지고
바깥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올 때
꼭 산 하나 출렁대며 들어오는 것 같아라
그 사나이
그런 산으로 들어갔는지
어느 날 아침
언제나 베고 눕던 목침 하나 남기고 갔다
그 낫 서너 자루 단번에 갈던 사나이
신석공이
아무리 무지막지한 싸움일지라고
그 사람만 가면
그 싸움 어찌어찌 가라앉는다
지랄병 난 사람
다 나 몰라라 하는데
그 사람이 업어다 주어
퉤 퉤 침 뱉으며 돌아선 뒤
마을이 예대로 고즈넉하였다
평생 남의 일 해주고
남의 마음 달래 주고
제 그림자마저
남을 위해 있다가
이 세상 떠났다
대천 신석공이
인공때
그 인공에 가담했다
그것으로 5년 동안
대전형무소 조용조용 살고 나왔다
고향에 있다가
서울 가서 살다가 병 나
밤중 서울에서 대천까지 오는 택시 안에서
그만 홍성 못 미쳐 숨 넘어갔다
그 신석공이 시체 업어 내린 날
하루내내 동네사람들 일손 놓았다
그 신석공이 묻히는 날
동네사람들 다 와서 세 번씩 곡하였다
마침 추석 전날이 장례날인데
다음날 추석날도
누구 하나 즐겁지 않았다
마을에 한숨 찼다
이불 없는 눍은이한테
이불 주어버리고
겨우내 덜덜 떨던 사람
신석공이
신석공이 마누라
대천 앞바다 삽시도에서
물 건너
대천으로 시집온 사람
잘도 생긴 사람
신석공이 사람
신석공이 마누라
어둑어둑 저녁나절
환히 피어나는 부용꽃 같은 사람
마음 어느 구석 뒤져보아도
사람 따지는 양심 없는 사람
일 잘하고
음식에 손 가면
그 음식에 설설 녹고
육회 잘 무치고
바느질 솜씨 좋고
손 가는 데마다 향내 나고
꼬인 일 풀어지는 사람
신석공이 마누라
그러나 그 금실 머던한 내외
잘도 살아가다가
지아비 신석공이 죽자
10년 지나
딸 키워 시집보내고
그 딸 뒤따라
새 지아비 얻어 나갔다
그렇구나
그 좋은 솜씨 써먹어야지
그 좋은 얼굴에 부용꽃 피어나야지
새살림 차린 뒤
긴 겨울철 처마 고드름 떨어지는 줄 모르고
그 고드름 녹는 줄 모르다가
고무신 끌고 나서서
먼데 아지랑이 바라보고
아이고 벌써 봄이 왔네
신석공이 마누라 아니라 장태문이 마누라
☞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의 우리 이웃 이야기를 되돌아 보는 것 같아 올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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