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禹錫(유우석) #2
懷古詩의 巨匠-劉禹錫
西寒山懷古
王濬樓船下益州, 金陵王氣黯然收.
千尋鐵鎖沈江底, 一片降幡出石頭.
人世幾回傷往事, 山形依舊枕寒流.
今逢四海爲家日, 故壘蕭蕭蘆荻秋.
*鎖; 쇠사슬 쇄. *幡; 기 번, 깃발이 나부끼다. *壘; 진 루, 성채 루. *蕭; 맑은 대쑥 소. *蘆; 갈대 노. *荻; 물억새 적.
진의 왕준 군선단이 익주에서 내려가니,
금릉의 왕기는 슬그머니 끝이 났다.
천 만 개의 쇠사슬을 강바닥에 깔았어도,
한 폭의 항복 깃발 석두성에서 나부꼈도다.
일생에 몇 번이나 지난 일을 슬퍼해야 하는가,
산들은 예와 다름없이 차가운 장강 물에 누워 있도다.
지금은 사해가 한 집이 된 시절이나,
낡은 성루의 가을은 쑥, 갈대, 억새들만 쓸쓸히 나부끼고 있네.
이 시는 懷古詩로, 西晉 太康 元年(280)에 王濬이 이끄는大 船團이 益州를 출발하여 吳나라를 멸망시킨 때의 상황을 시로 읊었다. 西塞山은 지금의 湖北省 大冶市 동족에 있는 산이다.
강동에 할거한 孫權은 이곳에 石頭城 요새를 쌓고 건업이라 칭하고, 229년에 정식으로 稱帝하면서 東吳의 황제로 즉위했다.
금릉은 吳, 東晉, 宋, 齊, 梁, 陳까지 六朝의 수도로 계속 발전하여 중국 사대 古都의 하나가 되었다. 吳나라 멸망 시 吳의 皇帝는 폭군 孫皓였다. 석두성은 남경 즉 金陵 방어의 요새인데, 청량산의 일부분으로 남경의 별칭으로도 통한다.
前 四句는 역사적 사실을 읊었다. 西晉의 武帝가 王濬에게 명해 東吳를 공격하게 했고, 吳의 폭군 孫皓는 수많은 쇠사슬을 강 밑에 장치하여 저항했지만 나라는 패망했다.
五. 六구는 대우의 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사와 자연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명구이다. 末聯은 모든 인간은 평화를 열망하고 권력은 무상하다는 시인의 생각을 의미화했다.
歷史의 흥망을 노래한 劉禹錫의 시 한 수를 더 보자.
蜀先主廟
天下英雄起, 千秋尙凜然.
勢分三足鼎, 業復五銖錢.
得相能開國, 生兒不象賢.
凄涼蜀故妓, 來舞魏宮前.
*凜; 찰 늠, 늠름한 모양. *五銖錢; 기원 전 2세기 漢부터 기원 후 7세기 隋나라까지 사용하던 고대 중국 화폐.
천하에 가득한 영웅들의 기개,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늠름하구나.
천하를 삼분하여 나라를 정립하며,
帝業은 옛 漢을 부흥시켰다.
제갈 승상을 얻어 개국할 수 있었으나,
아들이 있었지만 현인을 닮지는 않았다.
촉나라의 노래를 하던 처량한 기생들은,
위나라 궁에서 춤을 춰야만 했었네.
蜀漢(221~263)의 개국 군주 劉備의 廟堂인 武侯祠는 지금의 四川省 成都市 南門 武侯祠大街에 있다. 蜀漢과 劉備, 諸葛亮, 後主 劉禪 등은 모두 《三國演義》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들이다.
전반 四句는 劉備의 업적으로 漢을 부흥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였다. ‘三足鼎’은 제갈량의 三分天下와 대립항쟁을 뜻한다. 옛 漢의 ‘五銖錢’을 인용하여 漢의 계승을 서술한 것은 詠史詩로서 우수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후반 四句는 유비가 죽은 뒤 촉의 멸망을 묘사한 것이니, 역사의 아픔을 위나라 궁궐에서 춤추는 촉나라 歌妓를 통하여 그려냈다.
劉備의 뒤를 이은 후주 劉禪(207~271)은 41년 동안 즉위하다가 魏에 멸망당한 뒤, 위나라의 도움으로 살다가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선은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항복하고 몇몇 신하와 자식들과 함께 낙양으로 호송된다. 이 때 위의 실권을 장악한 사마소가 유선을 크게 꾸짖고 安樂公에 봉하고, 나라를 파멸로 끌고 간 내시 黃皓를 대신 처형했다.
유선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했고 나라는 망했어도 일생을 안락하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