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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케티 코티

德川 2015. 7. 13. 14:47

기사 관련 사진
 수리남의 코토미시와 앙히사 인형(왼쪽)과 돈키호테 인형(오른쪽)

 

 


"코토미시는 수리남의 수도인 파라마리보에서 주로 입던 옷이었다. 수리남의 여성 노예들은 17세기부터 노예제가 폐지된 19세기까지 200년 가까이 코토미시를 입어야 했다. 코토미시는 '뚱뚱하고 추하게'라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치마를 입기 전 속옷 차림에 좁고 긴 원통형 쿠션으로 몸을 감싸고 두른다. 그라고 여러 겹의 속치마를 겹쳐 입는다. 겉옷까지 여러 겹으로 입기도 한다. 상의는 블라우스, 그리고 소매가 없는 망토식의 겉옷인 케이프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몸이 마른 여성이라고 해도 입고나면 뚱뚱해 보이는 게 코토미시의 특징이다."(<갖고 싶은 세계의 인형> 중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여자는 최대한 몸매나 옷의 맵시를 살려 아름답게 보이고자, 남자는 남성적인 매력을 최대한 과시할 수 있는 옷을 추구해왔다. 아마도 거의 모든 인류가 그랬을 것이다. 아니 이는 지금도 옷을 선택하는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된다. 그런데 입는 사람의 몸매를 최대한 가리고 가려 최대한 뚱뚱하고 못생기고, 나아가 추하게 보이도록 옷을 만들다니. 이 이해하기 힘든 옷에는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수리남의 전통 옷 코토미시는 처음부터 이처럼 뚱뚱하게 그리고 추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 원래는 누구나 그렇듯 맵시를 살려 만들어 입던 옷이었다. 이런 옷이 그와는 정반대의 옷이 된 것은 서부 아프리카나 가나·나이지리아 등지의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가면서부터다.

수리남은 한때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당시에는 플랜테이션 농업이 성행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82년부터 수리남에 커피와 사탕수수 플렌테이션 농장을 만들기 시작, 아프리카 노예들을 데려와 노동력을 착취했다. 노예들은 상체를 드러내고 하체에 숄만 걸친 모양새로 일했다. 여성 노예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남성들에 비해 여성 노예들은 성적 노리개로 쓰이다가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다른 여성에 비해 돋보이는 미모나 매력은 치욕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던 것. 이에 여성들은 스스로 최대한 추한 사람으로 보이는 옷을 만들어 입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만난 코토미시의 시작이다.

코토미시라는 독특한 옷까지 나왔다는 사실은 당시 수많은 흑인 여성들이 성적 노리개로 희생됐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수리남은 7월 1일을 케티 코티라고 부르는 국경일로 정했는데 '케티'는 '사슬'을, '코티'는 '끊다'라는 뜻이다. 즉 노예라는 사슬을 끊은, 노예에서 해방된 날을 뜻한다.

'노예의 사슬을 끊으면서' 끔찍한 노예시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코토미시는 이후 사라졌을까? 아니란다. 매년 케티 코티 때가 되면 수리남의 여성들은 코토미시를 입고 거리를 즐겁게 행진한다고 한다. 코토미시를 입지 않은 여성들은 여성 노예들끼리만 통하는 방법으로 머리에 쓰면서 의사를 표현했던 머리 수건 '앙히사'를 쓰고 행진한단다.

수리남의 여성들은 잊으려 하거나 묻어버리는 것으로 치욕스러운 과거를 극복하지 않았다. 되레 그들은 흑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과거의 수난을 현재의 즐거운 기억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게 그들의 극복 방법이다. 그래서 수리남을 대표하는 인형은 코토미시를 입은, 현대에 이르러 많이 화려해진 앙히사를 머리에 쓴 흑인인형이다.

*펌글

 

출처 : 붓장난
글쓴이 : 덕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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